실록으로 확인하는 함경도 무관의 맨손무예 수박!

(편집부)= 함경도는 본래 고구려 땅으로 후에 조선시대를 거쳐서 한민족의 터전으로 자리매김 했다.

제목의 함경도 무관이란 꼭! 출생지 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된 수박, 군사훈련 목적으로 관찬사서에 수록되었던 것이기에 이지역, 저지역 다른 일본식 류파 생각하면 안된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하는것은 민간에서 하는것과 달리 일정한 기준에 따른 통일된 체계가 서 있어야 하는거다.

기고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김종서니 여진정벌이니 6진 개척이니 하는것은 교과서를 통해서도 독자들이 잘 아는 얘기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무관들이 전통무예 수박을 했다는 문헌이 부재한 관계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와 그 아들 이방원이 출생했던 함흥이 소재한 이 함경남도에서 우리 선조들이 무예의 기초가 되는 육박전 실력이 태권도 흰띠 수준으로 평가되는데 대한 지적이다.

세종때 김윤수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일찍이 갑사로써 왕을 호위하던 직책을 가지고 있다가 무과에 당당히 합격을 하셨다.

그럴 수 밖에 없었겠다. 워낙에 이 김윤수 어른의 무예가 출중했으니 말이다.

*갑사/ 고려때부터 전해지는데 조선시대 왕을 칼 차고 갑옷 입고 호위하던 요즘으로 치자면 청와대(대통령실) 경호원이 된다. 착호갑사라고 해서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직종도 있었다하니 우리 선조들이 수천년간 이 땅을 지켜 온 내공이 엿보이기도 한다.

김윤수(어른 생략)가 무예에 출중했다는 것은 세종실록을 들춰보면 알 수 있다.

노상왕이 모화루로 피서하니, 상왕과 임금이 나아가 문안하였다. 미리 장사(壯士)를 뽑아 모화루 아래에 수박희를 시키고 관람하였는데, 해연(海衍)이라는 중이 힘이 세어 여러 사람에 뛰어나니, 명하여 머리를 길러 환속(還俗)하게 하고 목면(木綿) 1필을 하사하였다. 진무(鎭撫) 김윤수(金允壽)가 8인을 이기니, 또한 상을 주고 이에 잔치했다한다.

*상왕은 이방원(태종)이다. 왕은 세종대왕이다.

김윤수가 그 자리에서 연이어서 8명이나 냅다 재껴 버렸다는거다.

○老上王避暑于慕華樓, 上王及上就問起居。 預選壯士, 使爲手搏戲於樓下而觀之, 有僧海衍者多力出衆, 命長髮還俗, 賜木緜一匹。 鎭撫金允壽勝八人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6월 20일 계사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당시의 함경도 군세를 살펴보자!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군정(軍丁)은 익속군(翼屬軍)이 4천 4백 72명이요, 선군(船軍)이 9백 69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5백 16명이다.

각설하고, 함길도(함경도의 옛 지명, 함경남도,북도 구분은 1896년에 했으니 따지는건 무의미하다)

함흥(咸興)의 군사가 6백 60명이요, 북청(北靑)의 군사가 5백 9명이요, 단천(端川)의 군사가 3백 20명이요, 길주(吉州)의 군사가 5백 7명이다.

함경도에 총 1996명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위에 소개했던 김윤수는 갑사로써 세종대왕 앞에서 아니, 1차,2차 왕자의 난으로 절대적 왕권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을? 이방원까지 포함한 자리에서 수박으로 8명을 쓰러 뜨렸다하는데 요즘의 UFC나 MMA격투기에서 챔피언 먹는 친구들은 저리가라지 싶다.

김윤수는 함경도 출신은 아니었으나 이후 세종이 함경도도절제사를 시켜 머나먼 함길도로 가서 웃자고 하는거지만 기러기 아빠이기도 했다.

1409년(태종 9) 23세 때 갑사(甲士)에 예속되었고, 그 뒤에 25세가 되던 1411년(태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갑사 시취과목에 수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려사, 왕조실록, 열전 등에 등장하는 무인시대 이의민, 두경승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것은 당시 갑사나 방패군을 뽑을때 수박으로 4인을 이기면 상등, 3명을 이기면 중등이라했는데 8명이나 이겼으니 실력 구비는 확인이 된다.

김윤수 [1387년(우왕 13)∼1462년(세조 8) = 76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무신

함길도병마절제사(咸吉道兵馬節制使)와 경상도안무처치사(慶尙道按撫處置使) 등을 지냈다. 

우연찮게도 김윤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수박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경제육전을 통해 시행되었다.

경제육전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추진하던건데 그 아들인 이방원때 조선 최초의 성문법으로 시행된거다.

얘기가 삼천포로 쌧는데 과연 함경도에서 맨손무예 수박을 군사들이 했냐? 하지 않았냐? 하는데 대한 사실확인은 1차 문헌사료가 우선이 되어야 하나 그게 다는 아니다.

지역적, 상황 그리고 주변문화, 후대의 증언 등 모두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데 긴요하게 쓰일 수 있다.

내친김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터넷으로 DB를 만들어 놓은 자료에 접근해 보니 북청이나 기타 함경남도 출신의 갑사로 무과에 합격한 이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아쉬운것은 경제육전 이후 경국대전부터 수박이 무과의 시취에 쓰이지 않았다는건데(군사를 뽑을때는) 고려, 아니 그 이후 이성계, 이방원 이복형제, 이방원, 세종, 아들, 손자, 수양대군까지 수박으로 갑사를 뽑고 힘 깨나 쓴다하는 장정들을 조선 팔도에서 신분 고하를 논하지 말고 중앙으로 추천하라고 했던 시기에 무과 시험과목에서 뺏다는 하나만으로 갑자기 중(승려)들도 했던 즉, 민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던 수박을 세조 이후부터는 무인들이 말 타고 활 쏘고 했지 절대 수박 안 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무예제보번역속집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어 국제정보가 되 버린 무예도보통지 권4 권법(수박의 별칭임. 권법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무과 시취과목은 아니었으니 군사들이, 장수들이 수박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것이다!가 논리인가? 아니면 괘변인가?

1790년에 관찬사서로 발간되었던 무예도보통지는 말 그대로 통지로써 정조가 한양의 중앙군 외에도 조선 팔도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펴 냈던 교본이다.

아래의 1790년 무예도보통지 발간 이후, 즉 권4 권법(수박)이 관찬사서로까지 나왔던 이후의 함경남도 북청과 인근 고을 무과시험 수험생들은 권4 권법은 싹, 빼 놓고 알지도 못했다 한다면 과한 얘기가 된다.

함경도, 특히 함경남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출생하고 조선 왕실의 근거지가 있던 지역으로 이성계 휘하 장수들 중에 함경남도 출신의 무장세력들이(그 때는 사병이 있었으니까)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이성계>이방원 경제육전으로 수박을 무과에 포함 시켰고 여흥거리로도 삼았던 우리 전통무예가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북방의 군영에서 행해지지 않았다하는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적어도 세종때 김윤수라는 분이 수박 기능자로써 함경도도절제사가 되었었고 그 휘하 장수, 군사들에 훈련 시키지 않았다면 김윤수는 군사 훈련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근무태도가 나태하고 술과, 잡기에 빠져 살았던것으로도 오해 받을 수 있다.

김윤수는 김종서를 도와서 함경도 6진 개척에 참여 했고 세종이 아꼈던 분이다.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 방목이라해서 본인과 가족, 출생지 등을 기록했었다.

[무과] 선조(宣祖) 35년(1602) 임인(壬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82위(98/102)

자(字)중신(重新)
생년갑술(甲戌) 1574년 (선조 7)
합격연령29세
본인본관태원(太原)
거주지북청(北靑)
선발인원102명 [甲1‧乙15‧丙86]
전력갑사(甲士)
부모구존구경하(具慶下)

[무과] 현종(顯宗) 5년(1664) 갑진(甲辰) 함경도별시(咸鏡道別試) 병과(丙科) 144위(152/300)

생년기사(己巳) 1629년 (인조 7)
합격연령36세
본인본관미상(未詳)
거주지북청(北靑)
선발인원300명 [甲1‧乙7‧丙292]
전력갑사(甲士)
무과규구6량 90보3시구입(六兩九十步三矢俱入)
유엽전 5시1중이상(柳葉箭五矢一中以上)
기추 1차2중이상(騎蒭一次二中以上)
3기취2기(三技取二技)

[무과] 현종(顯宗) 5년(1664) 갑진(甲辰) 함경도별시(咸鏡道別試) 병과(丙科) 287위(295/300)

생년계유(癸酉) 1633년 (인조 11)
합격연령32세
본인본관미상(未詳)
거주지북청(北靑)
선발인원300명 [甲1‧乙7‧丙292]
전력갑사(甲士)
무과규구6량 90보3시구입(六兩九十步三矢俱入)
유엽전 5시1중이상(柳葉箭五矢一中以上)
기추 1차2중이상(騎蒭一次二中以上)
3기취2기(三技取二技)

이것 외에도 많지만 생략한다.

고종때까지 존속했던 함경남도 남병영만 해도 초기 인근 고을 5백여명 후에 1천명까지 군사들이 확대 주둔했었다.

단천에는 봉대가 있었다. 여기도 군사 상주는 기본, 지금의 휴전선 근무하는 우리 군인들 생각하면 된다.

미사일 쏘고 핵 폭탄 터뜨리는 현대사회에서도 육박전 훈련, 태권도, 유도 등은 기본인데 조선시대 초중반에 북방을 지키던 군사들이 육박전은 즉, 수박은 하지 않았다?는 넌센스다.

© 2022 – 2023, 편집부. All rights reserved. 모든 콘텐츠(기사)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답글 남기기

Back to Top

국내외 포털 본지 기사 읽기

한국문화저널은 교보문고, 아마존에 출판을 지원합니다.

미국 아마존 출판도서 바로가기

한국문화저널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종합인터넷신문입니다. 제호: 한국문화저널 등록번호: 부산, 아00245 부산시 중구 중구로 61 4F 전관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송기송 대표전화: 051 241-1323 ※본지는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모든 콘텐츠(기사)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뉴스 미란다 원칙] 취재원과 독자에게는 한국문화저널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 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충처리인(soobakmu@naver.com) [해외교류]중국-길림신문 [해외지부]이란 하산모하이저, 이집트 에러보우디

you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