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이 문화재청(현,국가유산청)에서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고
남북한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난 2018년에 등재가 됐다.
이 씨름은 경상도식으로 알려져 있는 왼씨름 형식에 한하지 않고 함경도식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측에서 유네스코에 제출한 자료에 함경도식을 포함 했었다.
따라서 연구주제인 함경도 씨름은 이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형태의 광의의 씨름에 포함되는 것들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행해졌다하나
그도 말 뿐이고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본 연구자는 본인이 발행인으로 있는 한국문화저널(부산시 등록 인터넷신문)과 무카스 토론마당을 통해서
함경도식 씨름에 관한 기고를 수회에 걸쳐서 해 갈 생각이다.
이번 편은 유네스코 등재된 함경도 씨름의 전승자를 특정하고 그들이 출생했던 지역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이어서 연재 될 것으로는 상기 전승자들이 실제 행위했던 함경도식 씨름의 실체에 대한 사진, 영상자료들을 첨부해서 구체화 하게된다.
역사나 기타 문헌 기록들도 중요하지만 민간에서 전해진 이 함경도식 씨름에 대해서는 행위자, 증언 등이 우선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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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 전승자로는 지난 2017년 작고한 고,송창렬옹과 중국측 조선족 씨름왕이라 칭해지던 마동일 두명을 특정했다.
(이 기고는 문장 정리해서 학술 연구물로 국내외 등재가 될 예정이다)
[함경도 씨름 전승자]
한국측 전승자- 송창렬
송창렬은 1932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다.
이후 부친을 따라서 일본국 대판(현 오사카) 그리고 조선국 개성으로 이주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6.25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남북한이 서로 왕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송창렬에 의하면 해방 이후에도 함경남도 북청에 있던 할머니 집을 동생과 함께 갔었다고도 했다.
함경남도 북청은 송창렬의 친가, 외가가 있던 곳이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송창렬의 인척으로 북청 출신은 최현민 영화감독 및 기획자가 있다.
최현민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해서 누나 즉, 송창렬의 모친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고 영화계에 투신했다.
기고문을 수정할 생각이므로 세부적인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최현민은 1960년대 중반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기획하기도 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이 영화는 제3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제5회 대종상에서 특별장려상(김용연)을 수상했다.(출처 나무위키)
송창렬 모친은 1남 1녀중 장녀였고 최현민 감독은 유일한 남동생이었다.
최현민 감독은 송창렬의 외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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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 전승자- 마동일
중국 길림성은 함경도에서 이주 해 간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구한말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이주한 조선족들간에 함경도 씨름이 전승되었다.
마동일은 중국 조선족으로써 어릴때 씨름(함경도식)을 했다.
그 뒤 조선족 전문체육인으로 “씨름 왕!”이라 일컬어지던 마동일이 외부공개 활동을 한 시기는 1958년도 화룡현 서성공사 씨름대회에서 1등을 했고 1959년도 연변중학교팀 씨름대회에도 참가해 2등을 했다.
*함경도 씨름을 현지에서는 속쇄(구전이기에 쇠인지 아니면 쇄인지는 불확실함)라고 했다한다.
본래 명칭을 잃고 한국 씨름에 포섭되는 과정을 거쳐 독립된 무형유산으로써의 정체성이 희석된것이다.
함경도 씨름은 경상도식 왼씨름과는 구분해서 학술적 정립과정을 거침이 적절하다 여겨진다.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돐 기념경기에서 1등을 하고 모교인 화룡고중교문앞에서 황소고삐를 쥐고 포즈를 취했다.
1940년 마동일은 화룡시 서성향 용포촌의 한 농가에서 칠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화룡시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현급시이다.
1930년대 후반 마동일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화룡현 쟈피꺼우 고사리평에 이주했다고 한다.
마동일의 선친 고향에 대해서는 차후 자료채집케 된다.
마동일의 씨름표연이란 누구든 상관없이 한판 해보자는 사람들은 모두 나서서 도전할수 있는데 마동일이 운동장 가운데 버티고 서서 연이어 달려드는 상대자들을 재껴치우는것이다.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대회에서 약관의 나이로 우승을 하고나서 실제 20여명을 상대로 죄다 2:0으로 이긴 일화나
그 이듬해 화룡현 운동대회에서 마동일이 단 두판만 시합을 하고 1등을 했는데 참가한 선수들이 마동일과 붙는것을 기권 했기 때문이다
연변대학 체육학과 교수 등은 마동일이 년령과 체급에 관계없이 출전하는 전국 시합에서 우승한 것이 모두, 이 함경도 씨름 기술을 어릴적부터 익힌 덕분이라고 했다.
*실제, 마동일은 어릴적 친구들과 조선족 사회에서 전해지던 함경도식 씨름을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놀이겸 익혀서 몸에 체득을 했다고 한다.
종목명/ 함경도 씨름(속쇄)
전승지역/ 함경도
대표적 전승자/ 함경남도 출생 고,송창렬과 중국 길림성 연변주 화룡시 마동일(향년 85세)
자료채집/ 대한수박협회 송준호
연구참여자/ 중국 연변대학 교수 및 민족체육 전승자들, 길림신문 기자(언론인)인 연변대학체육학과 김영웅교수, 연변대학 태권도학과석좌교수 황경승(중국 태권도국가대표팀 감독), 김인택 연변태권도협회 부회장, 리설봉 중국 씨름협회장(연변성주청소년체육구락부, 연변유도대 교장), 길림신문 강동춘기자, 연변대학 체육학 박사과정 최룡원(중국 조선족 씨름챔피언) 등 7명
연구방향, 과제
기고자는 함경도에서 전승된 씨름을 발굴하고 한국사회에 알려 공론화를 거치고 있다.
연구에 참여하는 전문인들과 직접 현지에서 증언등을 녹음,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선행조치가 따라야 한다.
상기와 같은 계획하에 기고자는 연구방향과 과제를 몇가지 도출하고 이를 현실화 하기위해 투고를 하는게다.
(1) 함경남도 출생 송창렬(2017년 작고)과 중국 연변주 화룡시 거주 마동일씨가 어릴적 체득한 함경도 지역의 전래 체기와 그들의 삶을 채집하였다.
(2) 마동일에 대해서는 중국 연변대학 교수 및 민족체육 전승자들, 길림신문 기자(언론인)인 연변대학체육학과 김영웅교수, 연변대학 태권도학과석좌교수 황경승(중국 태권도국가대표팀 감독), 김인택 연변태권도협회 부회장, 리설봉 중국 씨름협회장(연변성주청소년체육구락부, 연변유도대 교장), 길림신문 강동춘기자, 연변대학 체육학 박사과정 최룡원(중국 조선족 씨름챔피언) 등 7명을 연구참여자로 하였다.
(3) 2016년 6월부터 총 3회의 중국 현지 학술연토회를 통한 함경도식 씨름의 역사성, 전통성, 향토적, 기술적, 실체적 접근과 송창렬과 마동일에 대한 생애사 일부를 증언과 영상, 관련 기사, 논문 참고 등으로 채집하였다.
내용의 신빙성을 높이고, 연구과제인 함경도 씨름을 더욱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주변문화로써 존재하는 몽골의 국기인 부흐, 일본 스모 등을 사회역사배경에 대한 문헌자료 수집과 기술의 동질성을 직접적인 비교, 교차검증으로 한국 샅바씨름의 아류라는 오류를 지적하려고 했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구과제를 제시하였다. 첫째: 함경도식 씨름은 한국의 샅바씨름에 포섭되는 부분적 개념인가?
둘째: 독립적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는 어떠한가?
셋째: 한민족 무예사 및 민족 정체성 확립과 동질성 회복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등이다.
7인의 체육인들과 구술 면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구한말 함경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이들에 의해 함경도식 씨름이 민간에서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근대 격변하는 중국의 정치,사회구조에 문화적인 정체성이 함몰되고 또 다시, 회복하는 등 순환을 거듭하였음이 확인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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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ost was last modified on 2025년 06월 12일 1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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